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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기록

3월에 걷기 좋은 하동 슬로시티 토지길

by 도토리초록별 2020. 3. 17.

 

지난 312, 하동 악양에 있는 박경리 토지길을 걷고 왔다. 매화꽃이 하얗게 피어난 고즈넉한 시골길을 걸으며 봄기운을 느끼고 싶었다. 코로나19로 사회 전체가 힘들고 위축된 상황이라 더더욱 몸과 마음에 휴식이 필요한 때기도 했다. 게다가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라 문학적 호기심까지 더해지며 설레는 맘으로 하동으로 발길을 옮겼다.

 

 

경남 하동의 악양은 슬로시티로 지정된 도시다. 슬로시티는 느림의 철학을 표방하며 성장보다는 성숙, 양보다는 삶의 질을 중요하게 여기며 느림과 작음,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국제운동이다. 국내에도 증도, 청산도, 담양 창평, 예산 등 15개 도시가 참여하고 있다. 악양은 야생차밭에서 나는 녹차, 대봉감 같은 지역의 슬로푸드, 섬진강과 지리산을 끼고 자연에 깃들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느린 삶이 가치를 인정받아 슬로시티로 지정되었다.

느림의 미학을 따라 사는 슬로시티 악양에서 나도 오늘만큼은 느릿느릿 걸으며 충전과 휴식을 얻고 싶었다.

 

 

화개터미널에서 탄 농어촌버스가 나를 내려준 악양면사무소 버스정거장 부근부터 슬슬 걷기 시작한다. 새벽부터 출발한 여행길이라 우선 요기부터 했다. 종일 걸으려면 에너지가 필수다. 게다가 시골에는 도시처럼 어디나 식당이나 가게가 있지 않아서 보일 때 먹어야 한다. 이른 점심으로 든든히 먹고 악양천 옆에 조성된 인공 숲, 취간림에서 걷기 시작한다.

 

 

토지길 도보 정보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없거나 훼손된 것이 꽤 있어 처음에 길을 좀 헤맸다. 인적 드문 시골의 골목들을 혼자 두리번거리다 만난 친절한 동네 어르신 덕분에 돌아 돌아 토지길에 무사히 들어섰다.

 

 

드디어 매화밭이 나온다. 매화꽃들은 이미 다 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매화향이 코끝을 기분좋게 간질인다. 쾌쾌한 비료 냄새도 섞여든다. 요맘때 시골에 가면 자주 맡게 되는 냄새다. 유쾌하지 못한 냄새지만 여기 사람들의 생계의 터전이니 어쩔 수 없다. 눈 앞에 산자락이 펼쳐지고, 초록 초록한 밭작물들이 봄을 느끼게 한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듯한 버려진 옛집도 구경하고 오랜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는 돌담길도 지난다. 마을마다 문패도 다양하다. 바로 옆 동네인데 참 다르다. 문패구경도 재밌다. 시골길 여행은 이렇게 소소한 것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걷다 보니 화사별서라고 불리는 조씨고가에 도착했다. 1918년에 화사 조재희가 지은 이 집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 나오는 최참판댁의 실제 배경이 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동에서 조 부잣집으로 유명했던 조씨 집안의 건축물로, 조선 시대 별장한옥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역사문화공간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내가 간 날은 코로나19로 문이 닫혀있어 내부를 둘러보지는 못했다.

 

 

코로나19의 여파는 여기 슬로시티 악양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참 밭을 다듬고 있는 나이 지긋한 농부들도 마스크를 쓰고 있다. 인구가 몇 안 되는 청정시골에서 노인들까지 하나같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고, 마스크를 쓴 채 밭을 갈고 있는 게 보기 안타깝다. 길을 걷다 만난 면사무소 직원들은 혼자 사시는 노인집을 가가호호 찾아 마스크를 나눠주고 있었다. 한 분에 3장씩. 오전에 식당에서 식사할 때 식당사장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도 의외였다. 오늘 아침 악양우체국에서 10시부터 마스크를 팔았는데 노인들이 7시부터 줄을 섰다며 혀를 차기도 했다. 마스크 절대량의 부족도 있겠지만 사회 전체가 집단 불안감에 빠져드는 게 아닌가 우려도 된다. 방역당국이 노력하고 있고 많은 시민들도 사회적 거리두기와 개인위생을 잘 실천하고 있다. 하지만 전 세계로 점점 확산되는 백신없는 코로나19의 대유행 앞에서 우리 모두는 불안감에 잠식당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부디 잘 견디며 이 과정을 넘어갔으면 좋겠다. 

 

 

악양면 부계마을에서 시작한 길이 조씨고가가 있는 상신마을을 거쳐 정서마을을 지나고 이제는 입석마을을 통과 중이다. 드문드문 집들이 나타나는 작은 마을의 골목길을 걷는 기분은 여유롭고 편안하다. 도심에서는 이렇게 평화롭게 골목을 거닐기 쉽지 않다. 대부분 아파트라 주택가가 많이 없는 데다 그나마 골목길에는 주차된 차량이 빼곡하고 수시로 지나가는 자동차로 안전과 고즈넉함은 찾기 어렵다. 그래서 오랜만에 이런 시골길을 만나면 기분이 좋다. 시골집 구경을 하며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밭이 나온다. 밭에는 뭐가 심겼을까 구경하며 걷다 보면 또 다른 풍경이 이어진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소박한 삶의 풍경이 눈앞에 이어지는 재미, 이게 바로 시골길 걷기의 즐거움이다.

 

 

산간마을의 과수원을 지나며 흐드러진 매화꽃 정취에 마음까지 밝아진다. 저 멀리 푸른 산자락에 눈도 시원해진다. 걷다 지쳐 길가에 앉아 물을 마시며 쉬는데 길가의 작은 봄꽃들이 방긋 아는 체를 한다. 냉이꽃, 봄까치꽃이 옹기종기 피어나고 있다. 땅에서부터 시작되는 작은 생명들에서 봄기운이 확 다가온다. 대지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에서, 따스한 봄햇살에서 봄이 느껴졌다. 이런 봄기운이 그리웠었다. 새벽부터 잠을 설치며 달려온 보람이 있다.

 

 

걸음을 이어 평사리 최참판댁으로 향한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 등장하는 최참판댁을 재현해 놓은 공간으로 한옥 건물들이 저 멀리 너른 평사리 들판이 바라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세워져 있다. 옆으로는 박경리문학관과 드라마 <토지>의 세트장 등이 옹기종기 모여있어 조선 후기의 생활상을 체험하거나 토지의 문학세계를 느껴보기 좋다.

 

 

코로나19로 임시폐쇄된 박경리문학관의 내부는 둘러보지 못하는 대신 문학관 마당에서 넓은 평사리 들판을 내려다본다. 하얀 아지랑이처럼 뽀얗게 만개한 매화꽃 너머로 푸른 들판이 시원하다. 푸른 봄기운에 바이러스로 위축된 우리의 어두움도 다 날려버리면 좋겠다.

 

 

최참판댁이 있는 이곳은 나들이 온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띈다. 악양면사무소부터 토지길을 따라 걷는 7km 가량의 길에서 스친 분들이 대여섯 명이 채 되지 않았는데, 그와 비교하면 많은 사람들이다. 대부분 가족별로 혹은 친구들끼리 바람 쐬러 온 방문자들이다. 반은 문 닫은 작은 상점가와 식당가들도 눈에 띈다. 주차장에도 관광버스는 한 대도 없다. 단체여행자는 보이지 않는다. 자가용만 몇 대 덩그라니 세워져 있다. 코로나19로 달라진 풍경을 실감한다.

 

 

악양면사무소부터 최참판댁이 있는 평사리까지 약 7km 구간을 다 걸었다. 쉬는 시간 빼고 3시간 정도 걸렸다. ‘박경리 토지길은 오늘 걸은 구간 외에도 평사리부터 화개까지 섬진강변을 걷거나, 벚꽃 명소로 유명한 쌍계사까지도 이어진다. 시간이나 체력이 되는 만큼, 혼자든 여럿이든 상관없이 자박자박 걷기 좋은 순하고 평화로운 길이다.

 

 

다 걷고 이제 평사리에서 농어촌버스에 올라 화개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한다. 버스 창 밖으로 오후 빛을 받은 섬진강 수면이 반짝반짝 빛난다. 좁지도 넓지도 않은 순한 강폭으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강변 모래톱이 고요하다. 지켜보는 마음에도 평화가 차오른다. 오래도록 지켜보고 싶은 풍경이다. 하동 슬로시티 토지길 여행의 마무리를 깔끔하게 완성시켜주는 풍경이다.

 

 

섬진강과 평사리 들판을 배경으로 대하소설 <토지>의 문학의 흔적과 봄이 오는 산골 마을의 골목길과 시골길의 정취를 느껴보는 시간이었다. 하동 슬로시티 토지길 여행, 매화꽃 흐드러지는 3월 요맘때 가볼 만한 여행코스다.

 

 

 

[3월에 가볼만한 곳] 섬진강 강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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