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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기록

기점소악도 순례자의 길

by 도토리초록별 2020. 7. 3.

섬과 섬을 잇는 노둣길을 따라 열두 사도 예배당을 만나는 고즈넉한 길, 전남 신안의 기점도, 소악도 순례자의 길을 걷다

 

 

5월 중순의 날씨는 화창하고 바다는 잔잔하다. 걷기에 좋은 날이다. 목포와 다리로 연결된 압해도 송공항에서 배를 타고 대기점도로 들어간다. 배 타는 시간은 약 1시간 정도다. 대기점도에 도착하면 노둣길을 따라 인근의 섬인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까지 이어 걸을 예정이다.  이렇게 4개의 섬에 흩어져있는 열두 사도의 예배당을 모두 걸으면 대략 12km가량 된다.

 

 

국토의 서남쪽 끝 다도해에 자리 잡은 작은 섬들에 어떻게 예배당이 있는 순례길이 만들어진 걸까. 그것은 전라남도의 가고 싶은 섬지원사업으로 가능했다. 섬 주민들이 지역의 특색에 맞는 콘텐츠를 발굴하면 지자체와 전문가들이 도와서 함께 만들어가는 방식이다.

기점도와 소악도 주민들은 섬의 자랑인 노둣길과 이 일대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순교한 문준경 전도사의 흔적이 어린 지역특성을 살려 '예배당이 있는 순례길'을 구상한 것이다. 그렇다고 열두 사도의 이름을 딴 예배당이 특정 종교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섬을 걸으며 조용히 사색하고 성찰하는 순례객이라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기도처이자 명상의 공간, 쉼터로 마련된 곳이다.

 

 

드디어 배가 대기점도 선착장에 도착한다. 바로 앞에 순례길의 첫 번째 예배당인 '베드로의 집'이 나를 반긴다. 그리스 산토리니섬을 연상하게 하는 흰색과 파란색이 산뜻한 등대를 닮은 작은 예배당이다.

 

 

예배당 옆에 있는 작은 종을 한 번 쳤다. 기점소악도 순례를 알리는 시작종이다. 길을 다 걷고 12번 예배당에서 열두 번의 종을 치면서 마무리할 것이다. 순례길의 작은 의식이다. 이제 베드로의 집을 나서 2번 예배당을 향해 발길을 옮기며 섬에서의 본격적인 순례길을 시작한다.

 

 

15분 가량 걸어서 도착한 두 번째 예배당은 '안드레아의 집'이다. ‘생각하는 집이란 이름도 붙어있다. 섬에서 만나는 예배당은 열두 사도의 이름 말고도 각각의 의미를 담은 이름이 하나 더 붙어 있다. 의미를 음미해보기 좋다. 실내로 들어간 안드레아의 집에서 밖으로 난 창을 보면 병풍도로 이어지는 노둣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창틀이 꽤 두툼한 돌로 만들어져 있어 독특하다. 알고 보니 동네에서 쓰던 맷돌을 다듬어 단 것이란다. 건물 앞과 건물 꼭대기에 고양이 조각도 독특하다. 사연이 있다. 대기점도가 고양이섬이라서다. 예전에 쥐가 많아 육지에서 고양이를 들여왔고, 쥐를 없앤 후에 개와 충돌이 있자 개를 쫓아냈다고 한다. 섬사람들의 고양이 사랑이 커서일까 안드레아 집에 조각된 세 개의 고양이상의 자태가 당당하다.

 

 

숲 입구에 위치한 단정한 '야보고의 집'을 지나 '요한의 집'으로 이어 걷는다. 요한의 집은 실내에서 하늘을 향해 난 스테인드 글라스와 흰 벽에 투영되는 색 그림자가 은은하다. 세로로 길게 난 독특한 창 밖으로는 작은 무덤이 눈에 들어온다. 얼마 전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마을 할머니의 무덤이다. 할아버지는 아내를 생각하며 이 예배당 터도 흔쾌히 제공했고, 순례자들을 위해 예배당도 늘 쓸고 닦는다고 한다. 작은 예배당에서 할머니를 그리는 할아버지의 마음에 나도 작은 마음을 보탠다.

 

 

대기점도에서 만나는 마지막 예배당인 필립의 집은 소기점도로 넘어가는 노둣길 앞에 위치해 있다. 이국적인 설계로 독특한 건물 모양이 시선을 잡아끈다. 전형적인 프랑스 남부의 건축 형태로 프랑스와 스페인의 작가가 참여해서 만들었다. 섬에서 만나는 예배당은 하나하나 개성이 넘치고 독특해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국내외 다수의 건축미술 작가들이 참여해 작업한 결과물이다. 각각의 예배당 건물은 2평을 넘지 않는다. 작은 규모라 소박한 섬에서 도드라지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 예술가들의 안목과 섬에 대한 이해가 느껴진다. 예배당 건축작품을 감상하며 고즈넉한 섬을 걷는 나의 발길도 가볍다.

 

 

멀리 바다를 향해 열린 망망한 갯벌 한가운데로 길게 뻗은 노둣길을 지난다. 다음 섬인 소기점도로 넘어가기 위해서다. 물때를 맞춰 온 나는 문제가 없지만 만약에 밀물 때 만조와 겹치면 길은 막혀버린다. 이곳은 하루에 두 번 물이 빠지고, 두 번 물이 들어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문득 밀물과 썰물로 수시로 길이 잠기는 곳에서 살아가는 섬 주민들의 마음은 어떨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번에 신종감염병을 겪으며 외국으로 가는 길이 막히고, 학교와 직장조차 갈 수 없고 외부로 향하는 길이 막혔을 때가 떠올랐다. 길이 막히는 경험은 고립감과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그런데 그걸 매일 겪는 섬사람들은 어떤 마음일까 싶었다. 자연에 기대 살며 두려움과 동시에 적응하며 삶을 일궈온 세월일 거라 생각이 든다. 그들에게 노둣돌은 고립과 두려움을 주지만 잠시 멈추고 기다리면 길이 다시 열릴 것을 알기에 희망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나도 앞으로 길이 막히는 때를 만나더라도 노둣길을 기억하며 힘을 내야겠다 마음먹으며 노둣길을 마저 걸었다.

 

 

호수 위에 지어진 감사의 집, '바르톨로메오의 예배당'은 유리로 지어진 건물이다. 햇빛에 반짝이는 알록달록한 유리색 건물이 영롱하고, 물그림자가 은은한 풍경을 만든다. 호수 위에 있어 건물에 직접 가볼 수는 없는 게 아쉽다. 동네 주민의 말로는 다리를 놓을지 오리배를 띄울지 모든 걸 열어놓고 상의 중이라고 한다. 재미있고 기발한 모습으로 순례객 앞에 등장하면 좋겠다.

 

 

이제 기점소악도 순례길의 반을 걸었다. 배에서 내린 대기점도에서 걷기 시작해 노둣길을 건너 소기점도를 걷는 중이다. 다리도 쉬어주고, 먹을 것도 좀 보충해줄 때가 됐다. 그때 쯤 나타나는 이 동네의 유일한 식당과 게스트하우스가 눈에 들어온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곳이다. 딱 쉬어가기 좋은 위치다. 나도 섬 백반으로 식사를 하며 원기를 보충했다. 백반과 함께 시켜먹은 김전이 독특하다. 김을 넣어 부친 전은 처음 먹어봤다. 맛은 그냥 담백한 김맛이다.^^ 기점도와 소악도 일대는 김양식을 많이 한다고 하니 싱싱한 김이 많을 수밖에. 시커먼 뻘에서 김을 양식하고 낙지를 잡고, 지천에 섬고사리가 올라오는 곳, 그래서 섬의 유일한 식당에서는 이 모든 것을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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